인생의 모든 순간을 진정한 무대예술로 물들인 아티스트

조갑중 한국음향협회 2대, 3대 회장

1993년 소리회의 태동, 한국음향협회의 창립과 무대음향협회의 설립. 이 모든 과정에 가장 선두에서 대한민국 무대음향계의 확장과 발전을 위해 전국을 누비며 헌신해 온 조갑중 고문. 특히 지금의 우리 무대예술전문인이 법정 의무 배치 인력으로 지정되어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공은 후대에도 칭송 받아 마땅하다. 연극 연출가로 시작하여 조명, 무대, 음향 어느 하나 소홀히 대한 적 없는 진정한 무대예술전문인으로, 그리고 3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사진작가로의 활동까지. 걸어온 인생의 모든 순간을 진정한 무대예술로 물들인 아티스트, 조갑중 선배님의 안내를 따라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취재, 사진 | 성재훈
편집 | 김수정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나는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에서 음향감독을 17년을 했고, 사단법인 무대음향협회 전신인 소리회 2대, 3대 회장을 역임한 조갑중이올시다.

고문님은 음향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는지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나는 처음에는 음향을 안 했어요. 원래는 연극 연출을 했었는데 연극을 하려면 조명도 알아야 하고 음향도 알아야 하고 무대도 알아야 하고 세트 제작도 알아야 하고. 그래서 그런 공부들을 시작했는데 그때 당시 명동 국립극장에 계시던 공성원 선생님께서 ‘야 너 조명 한번 해봐라.’ 하셔서 거기서 조명을 한 1년 정도 하다가, 공성원 선생이 ‘조명은 공부하는 놈들이 많은데 너 음향을 해보면 어떻겠냐’ 그래서 그때부터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공성원 선생님한테서 음향을 배웠어요. 그때가 1973년도, 군대 갔다 오고 20대 중반쯤이었죠. 솔직히 말해서 연극 연출하다 보면 카세트도 틀 줄 알고 릴도 틀 줄 알고 그건 다 할 줄 알거든요. 근데 이제 내가 실제로 여러 기계를 만져가면서 하는 공부를 공성원 선생한테서 배웠죠.

연극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됐습니까?

연극은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했어요. 서라벌고등학교 활동부에 연극반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제일 활동을 왕성하게 한 곳이었어요. 당시 광주에서 대한민국청소년연극제가 열렸었는데 동국대학교하고 붙어서 우리가 1등 했어요. 1등하고 오니까 서울역에 플랜카드가 쭉 있고 밴드부 와서 연주하고 학교까지 행진하고 난리가 났었죠. 출품 작품은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조연출을 했었고 연출은 돌아가신 연극계 원로 이진순 선생님이 하셨어요. 이 선생님을 외부 연출가로 모셔서 우리 학교 연극반 지도를 맡아주실 정도로 그때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대단했었죠.

그렇게 연극으로 시작해 프리랜서로 음향을 배우시다가 대학로 문예회관으로 입사하시게 되었군요.

대학로 문예회관(현재의 아르코 예술극장)은 1980년 12월에 시험을 봐서 81년 1월에 발령을 받았어요. 문예회관 입사할 때에는 필기 시험도 보고 실기 시험도 보고 다 봤어요. 조명도 그렇고 무대도 실제로 도면과 재료를 줘서 그걸 만들라고 하고. 그때 필기시험은 내 점수가 제일 높았다고 그러더라고요(웃음). 그때 개관 멤버로 소리회 1대 회장이었던 한철씨랑 같이 입사했죠. 입사해서는 모든 기계를 점검하는 일을 했고 2월부터 공연을 시작했는데 정식 개관은 4월 1일에 했어요.

그때 당시 문예회관은 새로운 형태의 신형 극장이었을 텐데, 입사를 하실 당시 극장 업계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그때 상황으로는 참 좋았죠. 왜 그러냐면 서울에 예술을 할 수 있는 공공 공연장이 그때만 해도 국립극장, 시공관(현 서울시의회), 남산드라마센터로 3개밖에 없었단 말이예요. 지방에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몇 군데 있었는데 그게 전부 전문 공연장은 아니고 시 행사 공간이었어요. 그러니 시에서 하는 교육, 민방위, 행사 등을 다 하면서 공연 외 용도로도 쓰였죠. 그리고 나머지는 세실극장같이 연극을 할 용도로 만들어진 사설 극장이었고요. 그런데 문예회관이 생김으로써 서울의 공연장이 5개(세실극장 포함)가 되니까 활동을 더 많이 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국립극장이나 세종문화회관은 자체 공연이 많았기 때문에 그 공연장들의 대관을 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힘들었어요. 우리 문예회관은 자체 공연이 거의 없었고 주로 대관 공연만 했으니까 연극, 무용, 음악, 국악 4가지 장르를 조정을 해서 대관 공연을 많이 받았어요.

또 당시에는 문예회관이라는 이름의 극장이 없었는데 우리 대학로 문예회관이 생긴 후부터 어디어디 ‘문예회관’ 이름으로 많이 생겼어요. 대학로 문예회관이 문예회관의 시초가 된 극장이에요.

그런 시기에 극장이 개관을 하면서 정말 많은 공연들이 들어왔을 것 같습니다.

만원사례도 받았어요. 단돈 천 원짜리라도 봉투에 넣어서 ‘만원사례입니다’ 그러면서 전체 직원들, 배우들한테 돌리고 그랬었죠.

당시 문예회관에서는 어떤 장비를 사용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입사하고 공연을 진행하면서 음향 시스템 수정을 많이 했어요. 당시 공연장을 잘 모르는, 전문가가 아닌 분들이 설계 작업을 했던 터라 하나하나 기계들을 많이 바꿨죠. 콘솔 같은 경우에는 어떤 회사 건지 기억이 안 나고, 릴 데크는 TASCAM 제품을 썼어요. 그때는 생각도 못했어서 콘솔 앞에서나 공연장에서 일하면서 동료들하고 찍어놓은 사진 같은 것들이 없는 게 아쉽네요. 연극 대본 등등 공연에 사용했던 자료들은 전부 한국문예진흥원 자료실로 이관시켰는데, 그게 아마 한 만 권 정도는 될 거예요.

만 권이면 자료가 엄청 많았네요. 공부도 정말 많이 하셨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죠. 연극 대본 같은 자료가 많았어요. 처음 연극 조연출을 했을 때부터 메모하면서 준비한 공연 대본들, 그리고 탁자에서 배우가 몇 발자국 걸어가 대사 하고, 또 몇 발자국 걸어가 침대에 앉고, 이런 동선까지 모두 그린 무대 조형도 자료도 있었어요.

연극 연출로 시작해 음향 감독까지 오랫동안 공연계에 계시면서 공연예술에 조예가 참 깊으시겠습니다.

연극을 하려면 음향도 알아야 하고 조명도 알아야 하고 무대 돌아가는 것도 알아야 하고 장치 만드는 것도 알아야 하고 다 알아야 해요. 종합 예술이니까. 그걸 모르면 공연을 이끌어 나가질 못해요. 그래서 대본을 보고 해석을 해서 연출자가 뭘 요구하는구나 빨리 알아차릴 수 있도록 각 파트의 공부를 많이 했었어요.

대학로 문예회관에서 젊은 시절의 조갑중 고문

  기억에 남는 작품 또는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대학로 문예회관에서 차범석 선생의 <산불> 작품을 김영덕씨가 연출을 했을 때에요. 대포 소리를 내야 하는데 릴에 있는 포 소리 갖고는 효과가 너무 미미할 것 같아서 그 소리를 직접 만들었어요. 대포 소리를 어떻게 만들었느냐 하면, 청계천에 가면 화약 있잖아요. 그거를 강한 플라스틱에 넣고 양쪽으로 철끈을 넣고 묶어서 그걸 전기를 통하게 해 스위치로 딱 누르면 뻥 하고 터지게끔 해서 대포 소리를 직접 제작했어요. 그렇게 올린 <산불>이 그때 당시 대박이 났었어요.

문예회관에 입사하시고 그곳에서 은퇴까지 하셨습니다. 몇 년 근무하신 건가요?

17년 조금 넘게 근무했어요.

17년 동안 공연장과 협회 등 여러 곳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시지 않습니까? 많이 바쁘셨을텐데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사람이랑은 묘하게 알게 됐어요. 프리랜서로 세실극장에서 연극할 때 우리 집사람이 그때 당시 근방 식당 종업원이었어요. 밥 먹으러 갔다가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만나서 계속 연애해오다가 문예회관에 입사하고 나서 결혼하게 된 거죠. 결혼은 1983년도에 우리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했어요. 그때 하객들이 객석 수보다 많이 와서 의자에 앉고 바깥에서 보고 그랬었네요.

개관부터 은퇴까지 일생의 중요한 순간들이 모두 대학로 문예회관에서 이뤄졌군요. 그 사이 93년도에는 음향협회의 전신인 소리회가 태동이 됐습니다. 소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나요?

소리회를 최초에 시작한 사람은 주석길씨와 박영철씨예요. 음향 감독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극장 음향 정보를 서로 교류하자는 취지로 이 둘이 추진을 했어요. 박영철씨랑 한철씨가 당시 국립극장의 음향 책임자였던 공성원 선생한테 조언도 들어가며 노력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전국적으로는 모집하지 않고 일단은 서울에 있는 극장만 모여보자 해서 우리 대학로 문예회관하고 국립극장,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이렇게 다섯 극장이 모였어요. 1993년 8월 15일에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약 50명 정도가 모였어요. 이제 단체 이름을 뭘로 할 것이냐에 의견이 많이 나왔었는데, ‘우리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해서 소리회로 결정을 하게 됐죠. 내가 기억하기로는 박영철씨가 이 의견을 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회장을 뽑는데 다수의 추천으로 한철씨가 초대 회장이 됐고, 그 다음에는 제가 하게 됐죠. 그렇게 94년도부터 약 5년간 2대, 3대까지 연임으로 제가 회장을 하고 이어서 4대는 오진수씨, 5대는 박영철씨, 6대가 한강희씨. 이렇게 역대 회장이 있었어요.

소리회 창립 후에는 모임을 어떻게 가지셨습니까?

처음에는 소리회 모임을 1년에 한 번씩 총회 때만 가졌었어요. 그러다가 ‘안 되겠다. 1년에 두 번은 모이자’ 해서 여름, 겨울로 두 번씩 모이게 됐는데, 여름에 모이는 건 그냥 친목 식으로 모이고, 겨울에는 정기 총회로 모였죠.

당시 고문님께서 추진하셨던 사업 중 기억에 남으시는 게 있나요?

그때 제가 소리회를 서울 모임에서 전국으로 확장시키는 일을 했어요. 처음에는 회원들을 서울에서만 모았기 때문에 지방에 있는 사람들도 참여시켜보자 해서 94년도에 나, 박영철씨, 한강희씨 이렇게 셋이서 한 3차 정도 지방 순회를 했어요. 그러면서 극장이 조금 더 잘 운영될 수 있도록 극장 환경에 맞게 건축 음향적으로 다듬어주기도 하고 우리가 아는 지식들을 공유하기도 하고. 그리고 소리회를 소개하면서 함께할 수 있도록 가입 권유도 해 전국의 회원들을 모았죠. 하도 사람이 많으니까 이제 지부를 설치하자는 얘기가 나와서 지부를 만드는데, 초기에는 경기지부, 충청지부, 호남지부, 대구지부, 부산지부 이렇게 5개로 나눴었어요. 그러다가 한참 후에 경기지부는 경기·인천지부, 충청지부와 호남지부는 그대로 가고, 대구지부를 대구·경북지부, 부산지부를 부산·울산·경남지부로 지금의 지부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그리고 무대예술전문인 자격증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했어요. 당시 공연장에서는 진급이 잘 안 됐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진급을 하려고 다른 부서로 가는 거예요. 우리가 가르쳐서 같이 일할 만하면 나가버리고 가르쳐놓으면 나가버리고. 이런 일이 부지기수라 ‘이거 안 되겠다’, 그래서 당시 국립극장에 있던 오진수씨와 문화관광부에 얘기를 해서 국가 시험 제도를 만들게 되었죠. 96년도쯤 국립극장에 무대예술전문인 자격증 제도를 담당하는 검정위원회 같은 부서를 하나 만들어서 제도 준비를 하고, 2000년부터 자격증 부여를 하기 시작했어요.

1996년도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이때 모임의 명칭이 소리회에서 무대음향협회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계기가 따로 있었습니까?

이제는 전국의 감독들이 모였는데 소리회라고 하기는 좀 아쉽더라고요. 회원들 사이에서도 음향협회로 하면 어떻겠냐는 얘기도 많이 나왔고요. 그렇다면 바꾸자 해서 자체 회의를 통해 무대음향협회로 바꾸게 됐어요.

그러면서 무대예술전문인협회의 발족에도 일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소리회를 무대음향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문화관광부에 등록을 하려고 했는데 안되더라고요. 무대예술쪽 협회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대예술전문인협회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음향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무대예술전문인’인데. 그래서 처음에는 협회가 아니고 분과로 해서 조명분과, 무대분과, 음향분과로 전부 했어요. 그렇게 해서 기억하기로는 아마 96년도에 무대예술전문인협회가 발족이 됐어요. 무대음향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등록을 하려던 시기에.

여러 노력으로 만드신 무대음향협회가 이렇게 발전해왔습니다. 협회가 더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에도 후배들과 술 한 잔 하면서 얘기를 한 게 있어요. 음향협회의 이사장 임기를 3년으로 하지 말고 4년으로 바꾸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 누가 하는 말이 ‘아유 고문님, 무대예술전문인협회도 3년인데’ 하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부터 바꾸면 된다. 그건 누가 만들었냐, 우리들이 만들었지 않냐. 임기 동안 뭐 좀 하려고 하면 그만둬야 되고 일을 좀 시작하려고 하면 이제 물러나야 되니까. 사업에 연속성이 자꾸 떨어지니 임기를 4년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을 했었어요.

그리고 이건 뭐 사담인데, 협회 행사에 가면 꼭 고문이라고 앞에서 인사를 시켜요. 난 말주변도 없고 원래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자꾸 시키니까 아주 난감해요(웃음). 나 말고 고문들이 또 있잖아요. 박영철씨도 있고 오진수씨도 있고, 사람들이 많은데 늙은이 자꾸 시키지 말고 젊은 사람들한테 시켰으면 해요(웃음).


음향의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에게도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후배들한테 할 얘기는 없어요. 이미 후배들이 각자 맡은 직무를 아주 잘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요즘에는 어떻게 생활하고 계신가요?

요즘은 김포시에서 하는 노인 일자리 신청을 해서 일을 계속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일 안 하는 날이면 항상 카메라 메고 사진 찍으러 다녀요.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으로서 활동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고문님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나는 이제 완전히 지는 해니까, 그저 내 건강이나 좀 챙기고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건강 말고 다른 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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