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에서 사운드로 이어진 33년의 여정

시네마에서 사운드로 이어진 33년의 여정

권 성 길 제주문예회관 무대음향팀장

1989년 제주문예회관 개관과 함께 영사 기사로 시작한 공연장에서의 인생이 어느덧 한 세대를 훌쩍 지나 드디어 그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우연하게 찾아온 음향감독의 기회는 운명이 되었고 제주도 최초의 공공 공연장에서 명예로운 정년 퇴임을 하게 된 최초의 음향감독이라는 기록까지 세우게 되었다. 육지에서도 쉽지 않을 협회 활동을 그것도 제주도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하였음에도 여전히 공연장이 그립고 협회가 애틋하다는 권성길 고문. 그 길고도 짧았던 33년 간의 여정은 그 자체로 제주 지역 무대예술계의 레전드가 아닐까. 권 감독님~폭싹 속았수다!*

취재, 사진 | 성재훈, 한대영
편집 | 김지연, 우성민

*매우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뜻의 제주방언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1989년도 7월에 제주문예회관에 입사해서 2021년 6월 30일 자로 정년퇴직한 권성길입니다.

음향 관련 일을 하시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처음에는 제가 일반 영화관의 영사 기사로 있었어요. 제주문예회관이 개관하면서 직원 공개모집을 하는데 영사기 관련 기사를 구한다는 공고를 지인이 알려줘서 서류를 내고 제주문예회관에 입사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음향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고 영상 관련 업무를 보다가 그 당시 계시던 음향 감독님이 다른 부서로 인사 발령이 나게 되면서 제가 그 자리를 메꾸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음향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볼거리가 많이 없었던 당시에 영화관은 많은 관객이 모였을 텐데 영사 기사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어릴 때 친구가 일하는 영화관에 많이 놀러 갔어요. 영화관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다가 친구 권유로 영사실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영사 기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자격증까지 취득했죠.

그때 기억에 남는 영화는 어떤 작품이 있었나요?

제가 영화관에 근무했을 당시 기억에 남는 영화는 성룡이 출연하는 중국 영화였어요. 취권이나 소림사 같은 영화요. 그리고 1980년대 초 람보 시리즈가 기억에 남네요.

한국 영화는 어떤 작품들이 있었나요?

한국 영화는 기억에 남는 게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납자루 떼, 고래 사냥 원 투, 가수 전영록이 출연했던 돌아이 시리즈 같은 것들이 있었네요. 제주문예회관에서도 제주도민의 문화 향유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좋은 영화들을 많이 상영했었어요. 디지털 영화가 나오면서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때 필름 영화들을 제가 영사했었습니다.

영화관 영사 기사로 재직할 당시 권성길 고문(1987~1988년)

제주문예회관은 언제 개관했나요?

1988년 8월에 개관했어요. 예술의전당과 비슷한 무렵이네요. 그 당시에는 전국에 공연장이 몇 개 없었어요. 그때 전국이 88 서울올림픽으로 환경정비와 도시개발이 한창일 때니까 아마 지역문화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방에 공연장을 하나씩 둔 것 같아요.

영화관 영사 기사로 재직할 당시 권성길 고문(1987~1988년)

그러면 제주문예회관이 제주도에서는 첫 번째 공연장인가요?

그렇죠. 그전에는 공연장다운 공연장이 제주도에 없었어요. 전무하다시피 했죠. 객석과 무대의 형태를 잘 갖춘 공연장은 제주문예회관이 최초였어요.

제주문예회관 전경

그때 공연장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처음엔 분위기가 직원들이 음향에 다 문외한들이었기 때문에 어디서 들은풍월도 없고 우리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도 그 당시 팀장님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는지 국립극장 스태프들과 교류할 수 있게 해주셔서 서울에서 일주일 정도 합숙도 하고 국립극장 기획 공연에 참여도 하면서 많은 기술을 전수받았죠. 그리고 문화예술진흥원에서 지방에 있는 스태프들을 위한 기술교육을 진행했는데 그때도 2주 정도 진행하는 합숙 교육에 참여하고 어깨너머로 많이 배웠죠.

문화예술진흥원 하면 지금의 아르코인데 그러면 그때부터 이미 교육 사업을 진행했었네요.

네. 덕수궁에서도 했었고 벽제 아르코 예술인력개발원이 생기면서 그쪽에서도 많이 했었어요.

그렇게 서울에 오가시며 음향 기술을 전수 받아서 제주도의 첫 공연장에서 공연을 진행하시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제주에 공연장다운 공연장이 처음 생기니까 제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과 도민들이 관심을 많이 줬죠.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만 음향 기술을 어디서 정식적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때는 음향이라는 기술이 생소했기 때문에 전문 지식도 부족해서 많은 공연을 통해 경험으로 부딪혀 가며 기술을 쌓았어요. 그래도 제주문예회관 직원들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 당시 팀장님께서 배려를 많이 해줘서 서울에서 진행하는 교육에도 많이 참여했어요. 제주도는 물리적으로 멀리 있지만 정보 교류를 위해 많이 나가야 한다는 그때 우리 팀장님의 마인드가 참 좋았던 거 같아요. 열심히 교류의 장에 나가서 배워야 한다. 공연장은 번듯하게 지어놨는데 직원들이 뭔가 알아야 잘할 거 아니냐는 생각이었던 거죠.

당시 제주문예회관이 아니고서는 공연을 관람하기는 힘들었겠네요.

일반 영화관은 대여섯 군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공연장은 학교 강당이나 시민회관의 작은 회의장 같은 규모 정도였기 때문에 공연장이라고 하기 힘들었죠. 그래서 제주 예술인들이 문예회관에 대한 기대감이 컸습니다. 공연에 대한 열망도요.

개관 초반에 근무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으십니까?

기억나는 공연은 제주도 도립무용단이 1990년에 창단되면서 했던 공연이네요. 지금은 관악단, 합창단과 함께 예술단으로 합쳐지면서 단체 규모가 커졌는데 그때는 무용단 하나 있었어요. 그때 국립극장 상임 안무가가 와서 한 달 동안 우리 무용단에서 가르치며 공연했었거든요. 그게 기억이 많이 나고 그다음에 1997년 아시아태평양 국제영화제를 제주에서 개최하면서 개막식 참여했던 것과 2002년도 월드컵 경기장에 60일간 파견하러 가서 근무했던 것이 국제 행사에 참여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참 기억에 남는 좋은 경험이었죠.

제주문예회관 객석 수가 800석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조직 구성은 어떻게 되었나요?

개관 당시에는 902석이었는데 현재는 많이 줄어서 828석이네요. 조직 구성은 스태프들이 많이 없었으니 열악했죠. 무대 기계 셋, 음향 셋, 조명 셋, 담당 계장 하나. 담당 계장을 빼면 9명이 대·소극장을 돌아가면서 다 관리했으니까요.

주로 대극장과 소극장에서는 어떤 공연을 했나요?

그때 당시에 기획 공연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초청 공연이나 대관 공연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제주 지역 단체들의 대관 공연들이 많다 보니 하루에 오전 오후 나눠서 두 팀씩 공연을 진행한 기억도 있습니다. 초창기엔 공연장이 없다 보니 제주문예회관 대관을 하려고 새벽부터 공연장 앞에서 대기했던 사람들이 어마어마했으니까요. 공연장 빌리려고 대관 시즌만 되면 사무실이 문전성시를 이뤘었죠. 심사해서 떨어지는 단체들도 많았고요.

당시 극장에는 어떤 음향 장비들을 사용했는지 궁금하네요.

음향 장비들도 지금에 비하면 아주 열악했죠. 타스컴 카세트나 릴 데크로 플레이하던 시절이니까 CD도 없었어요. 공연 중 자잘한 실수도 하고 장비 에러도 많이 났어요. 한번은 테이프가 늘어져서 사고가 나기도 했고 참 그런 일화들이 좀 있어요. 그런 아날로그 장비들을 쓰다가 요즘은 디지털 장비들을 많이 쓰니까 참 격세지감을 많이 느낍니다.

초기에 영화 영사 분야에서 무대 음향으로 업무 전환이 되면서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시려고 출장도 많이 다니시고 교육도 많이 들으러 다니셨는데 또 한 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장비가 바뀌는 걸 보시면서 또다시 공부해야 하나 부담을 느끼시진 않으셨는지요.

우리가 해오던 과정이 완전히 뒤바뀌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시대감을 많이 느꼈죠. 제주도에 있다 보면 정보 교류가 좀 안 되잖아요. 나름의 고민도 많이 있었는데 그래도 우리 음향협회에 행사가 일 년에 몇 번 있으니, 세미나에 가서 디지털 장비들을 만져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했어요. 그래서 음향 장비들이 디지털화되면서 협회 행사에 더 많이 나가려고 했었던 거 같아요. 협회에 가서 선후배들 만나 기술 교류도 하고 세미나 같은 데 가서 많이 들어보려고도 했고, 일 년에 서너 번씩은 꼭 참석했던 기억이 나요.

혹시 32년 동안 근무하시면서 아쉬운 거 없으셨습니까?

아쉬운 것은 많지만 그래도 나이가 딱 만60이 되어 직장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게 가장 아쉽더라고요. 게다가 내가 그만두는 시기에 코로나가 덮쳐서 퇴임식 행사도 못 하고 퇴직 임명장을 집에서 종이 한 장 받았어요. 왜 하필이면 그런 때 제대해서 진짜 종이 한 장 받았어요. 퇴직 임명장 귀하는 면직됐습니다. 하는 그 임명장 하나 주더라고요. 그걸로 끝났어요.

아쉬움이 많으셨겠지만 그래도 제주도 최초의 공연장에서 음향 감독의 역할을 32년 동안 해오시면서 나는 제주도 공연장을 위해 이거 하나는 좀 잘한 거 같다 하고 후배들에게 자랑하고 싶으실 만한 게 있을까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음향이 생소하고 그랬는데 옛일을 뒤집어 보면 참 매력 있는 직업인 거 같아요. 한 32년 이 직업에 있다 보니 애착심도 크고 퇴직하니 아쉬운 점도 많고 그렇습니다. 제가 딱히 자랑스럽게 내세울 건 없지만 그래도 아무 탈 없이 맡은바 직무 수행을 잘해서 아주 큰 사고 없이 정년까지 마쳤다는 게 참 자랑스럽고 우리 후배들도 앞으로 무궁한 발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나는 선배로서 굳이 후배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하기보다는 조용히 뒤에서 지켜봐 주면서 내 남은 시간을 할애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직업이 휴일도 없고 남들 쉴 때 바쁘고 그러지만, 도전해 볼 만한 직업이고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이지 않나 싶어요. 특히 요즘 또 장비들이 엄청나게 좋아졌잖아요. 나도 좋은 장비들과 좀 더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그 아쉬운 마음 담아 우리 후배들은 어쨌든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 테니 중도에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길 바라요.

32년을 공연장에서 남들 쉴 때 일하시는 생활을 해오셨는데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1987년. 영화관에서 근무할 때 결혼했어요. 영화관도 알다시피 1년 365일 영사기는 돌아가야 되니 거기 생활도 마찬가지였죠. 우리 집사람이 제가 제주문예회관에 들어왔을 때 근무 형태에 대해 이해를 한 게 영화관에서도 그렇게 일을 했으니까요. 그때 심야 상영도 있었어요. 영화가 끝나면 새벽 2시에 퇴근하고 그랬는데 그걸 이해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나 합니다. 제가 집사람에게 해준 게 별로 없어요. 양육이나 이런 것도 다 집사람이 알아서 했고 나는 직장 다닌다고 학부모로서 학교에도 한 번 못 가보고 우리 집사람이 다 했어요.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2녀 1남. 세 남매인데 능력이 있었으면 하나 더 낳았을 거 같아요. 지금도 나는 아이가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 성장해서 나가버리고 집에 집사람이랑 나밖에 없으니까 허전하고 아쉽더라고요.

87년에 결혼하시고 89년에 입사하셨으면 그즈음 첫아이가 태어났겠네요. 사모님께서 신혼살림도 참 바쁘게 사셨을 텐데 양육까지 혼자 담당하셨다니 돌이켜 보면 미안한 점도 있으시겠어요.

항상 집사람한테 미안해요. 그래서 중간중간 우리 집사람 데리고 협회 행사에 많이 갔어요. 하계 수련회 같은 데도 같이 가고요. 한 번씩 비행기를 타고 육지로 나가면 뭔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아서요.

2022년 경북 문경시에서 진행한 무대음향협회 하계수련회에 참석하신 권성길 고문님(좌측)과 박양규 호남지부장(우측)

평소에 사모님께 사랑해라는 말씀은 좀 하십니까?

쑥스럽게 그런 말은 못 하고 다 이심전심 마음으로 알겠죠.

그래도 이 기회에 한 번 해보시죠(웃음).

여보. 고맙고 사랑합니다. 영원히.

좋습니다. 그러면 혹시 그때 자녀들이 공연을 좀 보고 싶다 할 때 가끔 보여주시기도 했습니까?

그렇죠. 아이들 어릴 때는 어린이 공연을 거의 제가 전담했죠. 한 번은 우리 막내아들이 친구들이랑 어린이 공연 구경 가도 되냐고 해서 난 한두 명 오는 줄 알았어요. 근데 여덟 명 데리고 와버린 거예요. 처음엔 한두 명이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여덟 명을 우르르 데리고 와버렸으니 그런 아빠 찬스를 이용해서 제가 아주 당황했죠.

교육과 협회일 등 여러 가지 건으로 서울을 왔다 갔다 하시면서 그때 음향업체와의 관계라던가 음향업계의 분위기는 어땠는지도 참 궁금하네요.

지금은 물론 부조리 방지 차원에서 김영란법(청탁금지법)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전에는 우리 음향협회와 협력사와의 관계는 괜찮았어요. 서로 정보 교류도 하고 협회에서 협력사 측에 어떤 협조를 구할 수도 있는 부분이 있었고 그런 유대관계는 돈독했다고 봐요. 제 생각에는 너무 벽을 두기보다는 앞으로도 우리 음향업계가 더 많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는 게 좋다고 봐요. 우리 협회 기술 세미나나 하계수련회 때도 지원해 주고 하는 거 보면 애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지 어떤 이권이나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지 않나 싶어요. 그것도 옛날부터 내려오던 어떤 정 때문에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는 참 좀 의미 있게 받아들여요.

일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우리 문예회관이 초창기에 외부 초청 공연 중에 국립극장 공연이 많이 왔었어요. 그러면 거기에 따라오는 국립극장 스태프들이 그 당시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인데 그런 분들이 오면 일할 때 어깨너머로 배우고 끝나면 우리 제주문예회관 스태프들하고 뒤풀이 자리를 같이했어요. 보통 공연이 끝나면 9시나 9시 반 정도고 철수까지 하면 10시를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 제주도에는 12시 영업 제한이 있었어요. 12시를 넘으면 영업을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단 말이죠. 철수가 11시 가까이 되면 나가서 뭐 먹을 데가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손님 대접한다고 미리 시장 다 돌고 와서 무대 철수 끝나고 다 나갈 때쯤에 음식을 차려놓고 대접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 시절에는 참 그게 정이었어요.

우리 무대 음향협회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93년도부터 소리회로 시작했잖아요.

처음에 저는 협회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다가 한강희 전 회장이 어떻게 나를 알고 전화가 와서 우리 이런 음향협회가 있다 소개와 더불어 가입 권유를 해서 그때 가입하게 됐어요. 그때가 1999년 말 아니면 2000년 초인데 나는 제주에 있으니까 그런 협회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죠. 제주에서 내가 최초로 가입했다니까요. 나는 어쩌면 뒤늦게 음향협회에 가입했지만 참 협회 덕을 크게 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나한테 준 어떤 혜택은 나는 많이 누렸고 항상 협회에 자부심을 가지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제주에 있는 음향 후배들에게 참 많이 이야기해요. 1년에 한 번만이라도 협회 정기총회가 됐든 하계수련회가 됐든 아니면 코사운드든 참석해서 거기에 있는 선배님들하고 친분을 쌓아야지 우물 안 개구리 모양으로 제주문예회관에만 박혀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자꾸 충고하거든요. 지금도 저는 협회 선배님들을 찾아뵈면 제주도에서 온 후배라 그런지 많이 아껴주세요. 사랑을 많이 받았죠. 근데 저는 옛날부터 나이는 어려도 어디 수련회 같은 데 가면 고문 방에서 잤단 말이죠.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고문 대접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는 엊그제야 고문이 됐는데 다른 후배들은 영원히 고문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혹시 우리 무대 음향협회에 바라시는 점이 있으십니까?

한 가지 안타까운 거는 우리 선배님들이 본업에서 퇴임하시고 난 이후에는 거의 행적이 없다는 거예요. 퇴직했더라고 협회에서 고문이라는 어떤 직책 아닌 직책을 주면 1년에 한두 번이라도 얼굴을 내밀면서 후배들을 독려하고 그러면 그 선배들의 어떤 존재감도 생길 텐데 퇴직과 동시에 아예 안 나타나 버리니까 그게 좀 아쉽죠. 지금 고문들이 한 11명인가 12명 되요. 앞으로도 더 많아질 텐데 협회 차원에서 퇴임하신 선배님들과의 어떤 만남의 장이라고 할까 재능기부 활동이라든지 선배님들이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좀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와서 소일거리라도 할 수 있겠죠. 점점 그분들이 안 나타나 버리면 그 선배들의 존재감도 기억 속에서 차츰 멀어지지 않겠어요? 일대일로 만나기는 힘드니 만날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참 아깝고 아쉬운 선배들인데 퇴임과 동시에 현직에서 물러났다고 집 안에만 계시고 하는 게 안타깝죠. 제게 이제 퇴직도 하셨는데 왜 자꾸 올라오시냐고 하는 후배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퇴직하니까 더 올라와야겠더라고 했어요. 남는 게 시간인데요. 그래도 1년에 한두 번 와서 봐야지 협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알고 퇴임과 동시에 무관심해져 버리면 선배로서 도리도 아닌 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철 고문님 참 존경해요. 초창기 소리회의 창립 멤버이시기도 하고 협회 모임에 자주 참여도 하시는데 그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후배들이 하나의 본보기로 보고 참 존경합니다.

2023년 무대예술전문인 정기총회(경기도 성남시)에 참석하신 권성길 고문님(우측)과 한철 고문 님(좌측). 무대음향협회의 살아있는 역사로 현역 감독들보다 더 열심히 협회 행사에 참여하시며 후 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분들의 역할을 저희가 확실히 만들어 주면 좋겠네요.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할 거 같아요. 그냥 나오시라고 하면 뻘쭘하거든요. 나같이 그냥 맨날 행사에 왔던 사람이야 자연스럽게 오는데 가끔 오시라고 하면 못 오거든요. 자주 와봐야 익숙해지니 협회에서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협회에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쩌면 어떤 보답이랄까요? 내 방식은 이거인 거죠. 내가 협회 행사에 많이 참석함으로써 후배들이 제주도에서 권 선배님도 오시는데 라는 어떤 모범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선배로서 그런 모범을 보이면 후배들도 협회 행사에 참여도가 올라갈 것 같아요.

저희 SSM이 작년부터 시작해서 이제 7호가 나갑니다. 일 년에 4호씩 해서 2년 차인데 SSM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예전에 한 번 만든 적이 있었잖아요. 종이로. 그건 구독의 한계성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의 웹 콘텐츠로 만들었잖아요. 그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생소할 수 있어요. 나도 그게 익숙하지 않아 못 보고 있다가 이번에 한번 보니까 참 좋더라고요. 왜냐하면 거기 내용들을 보면 각 공연장의 음향 장비 실태라든가 장비 측정 같은 유익한 내용이 많고 업계 동향이나 협회 기술 세미나 정보도 실려 있어 내용들이 참 알차고 좋아요. 나는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후배들이 이런 걸 보면서 좀 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공연장의 장비 스펙을 보면서 자기네 공연장하고도 한 번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워요.

사실 1기 선배님들부터 쭉 30년 넘게 만들어 오신 그 결과물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우리 음향협회가 더 발전이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배님들도 한 30년 이상을 그 한 곳에서 열심히 했을 거 다 말이죠. 그런데 이제 자의에 의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고 물리적으로 때가 되니까 물러나는 거잖아요. 아쉽기는 하지만 자기 맡은 바 일을 다해왔고 열심히 살아왔고 그 결과로 명예롭게 퇴직했는데 하나 아쉬운 건 그분들이 잊혀 간다는 거예요. 우리 협회가 1993년에 소리회로 출범한 이후로 그분들이 있었기에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잖아요. 그러면 그분들을 위해 소규모 장을 만들어서 집에만 있지 말고 한 번씩 나올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거는 누군가 개인이 해서는 안 되고 음향협회가 좀 나서서 선배들을 챙겼으면 해요. 이제 계속 퇴임하는 후배들이 많이 나올 텐데요. 물론 나름대로 제2의 인생을 추구하는 친구들도 있겠고 실력이 좋아서 교수진들로도 가고 있겠지만 그게 일부거든요. 모든 사람이 갈 수 없잖아요. 그런 것을 좀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주도 공연장의 무대 음향 감독으로서, 맏형으로서 제주도에 있는 음향 후배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여기에서 맡은 일을 충실히 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다들 실력이 있지만 지금 시대가 엄청나게 변하는데 여기 제주에 국한돼 있지 말고 자꾸 나는 밖에 나가기를 권해요. 1년에 한두 번쯤 협회 행사에 가서 새로운 장비도 한번 보고 자꾸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좀 영광스럽게 마지막 소임을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요즘 나가면 장비들 엄청 좋잖아요. 그거 한 번씩 보고만 와도 난 좋을 것 같아요. 부지런히 열심히 공부하라 그렇게 말해주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이제 인생 2막을 살고 계시는데 요즘 어떠십니까?

나름대로 지금 손주들 보면서 장인어른이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밀감밭 농사를 집사람하고 준비하고 있어요. 나는 거의 머슴이죠. 왜냐하면 완전 농사일은 초짜잖아요. 한 번도 안 해봤고 농약 칠 줄도 모르는데. 나는 그저 우리 집사람이 가는 데 따라다니면서 도와주고 그러고 있죠. 그리고 제가 코로나 시기에 퇴직했잖아요. 코로나 때 밖에 나가지 못했으니까 우리 집사람이랑 여행도 좀 다니고 그러면서 나의 시간을 좀 가져 보려고 합니다. 그다음에 어떤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또 다른 고민을 해봐야죠. 그렇게 남은 인생 멋지진 않더라도 후회스럽지 않게 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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