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음향과  함께 한 36년, 그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무대음향과 함께 한 36년,
그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김 호 성 국립극장 무대예술부장

숫자만  떠올려도 그저 아득하기만 한 1986년, 호암아트홀을 시작으로 국립중앙극장까지 무대 공연예술 현장의 최전방에서 보낸 시간만 어느새 한 세대가 훌쩍 지나버렸다. 무대음향 업계에서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김호성 부장의 발자취는 곧 대한민국 무대음향 발전의 역사이다. 숨 가쁘게 지나온 세월, 이제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고 계신 선배님의 지난 36년을 소환해 본다. 응답하라 1986!

취재 | 성재훈•윤보라 
자료정리 | 윤보라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국립극장 무대예술 부장 김호성입니다. 

저는 1986년 4월 1일 중앙일보 호암아트홀의 음향감독으로 공연장과 인연을 맺은 후, 2001년 3월 21일부터 현재까지 국립극장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음향감독으로 일한 지 36년 정도 되었네요.

36년이면 대한민국 음향 발전사를 몸소 체험하셨을 것 같습니다.

제 위에 선배님들도 많이 계셨으니까 발전사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처음 공연장 음향감독을 시작할 당시에는 서울예술의전당이 있기 전이었고, 공연장 이라는 곳도 많지 않았어요. 사실, 공연장 엔지니어라는 그런 개념도 없었던 때였죠. 공연장 스태프 양성 관련 학교도 없었기 때문에 음향 스태프라고 하면 일반 공업고등학교나 전기, 전자, 기계과 출신들이 많이 입문했었습니다. 저 역시 전자과 출신으로 음향을 처음 입문했고요. 

음향 분야의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광석 라디오를 만들었는데, 처마 밑에 철사 안테를 연결해도 라디오 소리가 나오는 게 신기했고, 지글지글한 AM 라디오 그 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고교시절 실습 시간에 전축을 만들면서, FM 라디오방송의 음악도 접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음악을 만나게 되었죠. 음악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1986년 군에서 제대 후 중앙일보 호암아트홀 음향기사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국립극장 김호성 무대예술부장

그때 당시 호암아트홀에는 어떻게 입사하게 되셨는지요.

호암아트홀은 1985년 5월 1일에 개관했는데,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결원이 생기면서 공고가 났었어요. 제가 들어갈 때 3차 공고였던 걸로 기억 하는데, 약 20:1의 경쟁률이었다고 들었습니다. 

1980년대에 공연장은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뿐이어서 경쟁률이 엄청났을 텐데, 공연장 음향감독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때 당시 호암아트홀 기술스태프 구성은 기술 국장님부터 기술부장, 차장, 음향감독, 조명감독, 기계감독이었는데, 모든 분이 지금의 KBS2 전신 인 TBC 방송국(동양방송) 출신이셨어요. 이분들 이 1981년 방송 통폐합 되면서 전부 KBS 방송국 으로 이직하셨다가 중앙일보에서 호암아트홀을 건설하면서 다시 엔지니어로 돌아오시게 된 거죠. 저는 호암아트홀 개관 후 11개월 만에 입사하게 되었어요. 

1986년만 해도 공연장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방송국 공개홀이 공연장 개념으로 운영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방송국 출신 감독님들이 많았어요.

당시에 호암아트홀은 어떤 공연장이었나요?

호암아트홀은 개관할 당시 객석이 1,000석 이었어요. 1,000석이다 보니까 체적에 비해 객석이 조금 좁아서 1987년쯤에 866석으로 객석을 리모델링했어요. 그리고 개관 초기에는 정통 클래식, 연극 등의 공연을 주로 했었습니다. 국내•외 내로라 하는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소프라노 등 많은 음악가가 수준 높은 공연을 했었죠. 그때 당시 삼성그룹의 전폭적인 지원도 있었기 때문에 장비나 시설면에서도 아시아권 에서 아마 최고였을 겁니다.

호암아트홀에 입사하고 첫 공연이 어떤 공연이었는지 기억나세요?

네, 기억납니다. 첫 공연이 지금은 고인이 되신 경기민요 안비취 선생님의 공연이었어요. 그때 보유하고 있던 무선 마이크는 8대인데, 출연 인원 이 약 60명이었어요. 처음 공연장에 들어가서 음향을 접했는데, 무선 마이크 8대로 릴레이와 유선 마이크 전환을 담당해야 했죠. RF라는 개념도 없었고, 무선 마이크가 끊어지지 않게, 각자 정해진 공연 순서대로 마이크를 전달해야 하는데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문화사업부 기획공연 이었는데 다행히 실수 없이 공연을 잘 끝냈고, 국장님 과 부장님 그리고 선배님들에게 호평을 받았어요. 무선 마이크 전환 시 출연자들에게 “이 자리에서 전환하겠다.”라고 약속했었는데, 그분들이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었고, 덕분에 실수가 없었어요.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중앙일보 문화사업국에서 기획하는 공연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아직도 성황리에 올리고 있는 공연 이 난타인데요. 초연 당시 제가 직접 음향 디자인을 하면서 완성도에 기여했죠. 그래서 아직도 난타하면 내 작품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지금도 초연 당시 디자인한 그 포맷대로 따라가고 있는 걸 보면서 뿌듯한 마음도 있어요.

재밌었거나 아찔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호암아트홀에 있을 당시 뮤지컬 작품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삼성 영상사업단에서 ‘42번가’ 작품을 만들었는데, 초연 공연을 호암아트홀에서 했어요. 의상부터 무대 전환까지 기존에 우리나라에서 추구하지 않았던 작품이라 다들 깜짝 놀랐죠. 외국에서 온 엔지니어가 음향시스템을 디자인하고, 운영은 영상사업단에서 인수인계를 받고, 저는 호암아트홀 음향감독으로서 같이 운영을 했었어요. 그때 호암아트홀 전기의 접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Amek Recall 콘솔에 무선 마이크를 연결하다가 시그널의 접지 전원이 마더보드 쪽에 영향을 주어 16채널 보드가 다 나가버렸어요. 내일 모레 첫 공연이었는데, 아찔했죠. 업체의 지원으로 밤을 새워가며 마더보드를 보수해서 콘솔을 복구했고, 무사히 공연할 수 있었습니다.

호암아트홀에서 14년을 함께하시다가 2001년에 국립극장으로 오시게 된 거죠?

네, 국립극장이 2000년도에 책임 운영 기관으로 바뀌었어요. 별오름극장은 건설단계였고, 해오름극장, 달오름극장 2개 공연장과 국립극단,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 4개 단체를 같이 병행해서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때 4개 단체가 함께 참여한 총체극 ‘우루왕’이라는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음향적인 부분에 비중을 많이 두게 되면서, 음향 스태프를 보강하기 위해 공고가 났습니다. 제가 그때 지원해서 국립극장에 입사하게 되었죠.

국립극장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가고 싶은 공연장인데 어떠셨나요?

국립극장에 처음 발을 디딜 때, 사실 어깨가 많이 무겁고, 두렵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국립극장이란 타이틀에 많이 경직되었고요, 적응하려고 많은 노력하였습니다.

국립극장에 적응하면서 뿌듯했던 점은 장비들의 퀄리티였어요. 콘솔이 YAMAHA PM-1D 디지털 콘솔이었는데, 그때 당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막 넘어가는 단계였거든요. 국립극장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앞에서 이야기했던 ‘우루왕’ 작품이 국립국악관현악단 80채널, 그리고 출연자 무선 마이크 30~40채널 이상 사용했던 큰 작품이었는데, PM-1D가 126채널 수용이 가능한 콘솔이라 공연을 진행할 수 있었죠. 

반면,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이 컸던 점도 있어요. 국립극장의 경우 조달청에서 입찰을 통해 장비를 구매해야 하니까 제가 원하는 장비를 구매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국립극장 전경

부장님께서 국립극장에 입사하고 나서 무대음향 파트에 변화된 부분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국립극장 입사 후 제가 개인적으로 맡은 첫 공연이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군포문화예술관 공연이었는데, 그때 사용한 마이크가 86채널 정도 되었어요. 저는 호암아트홀에서 뮤지컬을 진행 하면서 ‘오디오 플랜(채널 시트)’을 계획하고 구성하는 습관이 되어있어서 국립극장에 적응 하려니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워하더라고요. 그래서 “스피커 배치는 이렇게 하고, 마이크는 어떤 마이크를 사용하고, 스탠드는 몇 개를 준비하고, 케이블은 몇 개를 준비하는지 플랜을 기록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해줬죠.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점점 ‘오디오 플랜(채널 시트)’에 적응하면서 업무가 체계적이고, 빨라 지게 되면서 같이 공유하고, 계속 발전되어 나가고 있어요. 

현재 국립극장 인력구성은 어떻게 되어있나요?

국립극장은 극장장님을 중심으로 운영지원부, 공연기획부, 무대예술부, 교육전시부 4개 부서가 있고,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 3개 단체가 있는데, 무대예술부 전체 총원은 72명입니다. 그 중 무대예술인 자격검정위원회가 4명이고, 무대기술팀, 무대미술팀이 40:30정도 비율로 구성되어 있어요. 무대예술부 파트는 무대예술부 부장을 중심으로 무대기술팀, 무대 미술팀으로 나뉘는데, 무대기술팀은 무대감독, 기계, 음향, 영상, 조명, 각 파트 책임감독과 팀원들로 그리고 무대미술팀은 무대장치, 작화, 무대의상, 장신구, 소품 등 각 파트 책임감독과 팀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립극장 객석 전경
국립극장 무대 전경

국립극장 하면 리모델링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2001년에 했던 리모델링은 중앙 계단을 없애고, 객석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로고를 새롭게 한 정도였고, 2004년에는 객석 의자를 전면 교체 하고, 로비를 리모델링 했습니다. 그러다 2017년 에 기재부 예산 지원 후 기본 설계를 거쳐 전면 리모델링을 시행하게 됩니다. 리모델링 전 가로 폭이 23m나 되는 무대에 세트를 가득 채운 규모의 작품을 가지고 투어할 수 있는 공연장이 없었죠. 지방 투어를 다니기 위해서 무대 세트를 다시 만들고, 공연을 축소해야 하는 문제점으로 인해 폭을 줄이게 되었습니다. 무대 크기를 표준화 해보자는 생각으로 무대 가로 폭을 17m로 줄였어요. 그러면서 객석을 1,564석에서 1,221석으로 축소하고, 무대 높이를 1.6m 이상 낮추면서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무대 시야각을 조금 더 편안하게 하여 무대에 몰입할 수 있게끔 했습니다. 또한, 무대 상부, 하부, 객석, 로비, 분장실까지 공연장 뼈대만 남겨두고, 내부를 새로 다 바꿨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국내 공연장 최초로 이머시브 몰입형 스피커 시스템을 도입했는데요. 반응이 궁금합니다.

처음 리모델링 계획 당시에는 L, C, R 시스템이었는데, 당시 김철호 극장장께서 삭감된 예산을 회복하는 데 힘 써주셨고, “입체 음향 시스템이 있어야 된다.”라고 하셔서 검토하고 수정하게 되었죠. 현재의 이머시브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과연 이 시스템이 맞을까”라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매우 컸어요. 예산을 확보해서 리모델링한 만큼 어떤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해외 공연장을 답사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정보와 자료를 얻었고, 그 자료를 토대로 이머시브 시스템을 도입하여 관객들이 더 몰입할 수 있는 사운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 메인 스피커 시스템 전경

이머시브 몰입형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 공연을 진행하면서 어떠셨나요?

예전에는 L, C, R 이런 개념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음의 정위감이 사실은 좀 없었는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 나아졌고,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관객들 또한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사운드 디자인을 하는데, 어려운 점이나 불편한 점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기본 포맷 자체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 시스템이어서 시간이 더 걸리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장애가 되는 부분은 많은 스피커가 리깅 되다 보니 조명이라던가 무대 구조물에 방해가 될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작품을 위해서 서로 조율 해나가고 있어서 어렵거나 크게 문제되는 부분은 없어요.

국립극장은 지방이나 해외 투어를 많이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0년도에 책임 운영 기관이 되면서 3개 예술 단체의 공연과 대관공연 등 공연장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작품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방이나 해외 투어를 많이 다니게 되었죠. 2001년부터 다니기 시작했는데, 거의 렌탈 회사 수준이었어요. 투어를 많이 다니면서 기술적인 면에서 향상되는 게 느껴졌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이 많아지다 보니, 점점 노하우가 쌓이더라고요.

해외투어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저는 국악관현악단 공연을 많이 다녔어요. 한번은 베트남 푸토성의 1,500석 야외공연장에서 공연 했는데, 음향 시설이 굉장히 열악 했어요. 그날따라 날씨도 흐렸는데,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1:1로 마이크를 설치하고, 마이크 잭 불량이 많아서 절연테이프로 감아서 하나하나 체크하고, 리허설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 였죠. 그런데, 날씨가 흐려지더니 소나기가 내려서 공연이 취소되었어요. 그날은 정말 아쉬웠습니다.

 또 한번은 이란을 갔었는데, 그때 당시 이란은 입국하기 까다로운 나라였고, 국악관현악단 단원들이 전부 히잡을 쓰고 공연을 했어요. 제가 원하는 콘덴서 마이크를 렌탈해주기로 했는데, 요구했던 수량만큼 나오지 않더라고요. 현장 상황에 맞게 빠르게 기술적으로 대처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순간적으로 과감한 판단력도 필요한 것 같아요. 음향감독으로서 책임과 소신을 갖고, 밀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해외투어- 덴마크 왕립오페라하우스
해외투어- 노르웨이 오슬로오페라하우스

현재 우리나라 공연장 분위기나 공연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지역 문화예술회관에 전문 스태프들이 없었어요. 음향장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전문 공연장이라고 보기에는 굉장히 열악했었죠. 그러다 문화예술분야의 지원이 나아지면서, 무대예술전문인 자격증이 생기고, 공연장도 활성화된 것 같아요. 요즘 외국에 가서 봐도 필름 문화보다는 공연 문화가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필름 문화는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문화이지만, 공연 문화는 일회성이고, 휘발성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시간을 내고, 티켓을 사서 보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공연 구성부터, 공연하는 예술인, 공연을 보는 관객, 공연을 진행하는 스태프까지 공연 문화 자체가 점점 더 발전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요즘 K-POP, K-DRAMA가 해외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멀티미디어 문화와 비교했을 때 공연 문화는 어느 정도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 국립극장 무대예술부장으로서 공연 문화 중심에서 얘기하자면, 일단 K-POP은 전 세계 사람들이 많이 듣고, 그만큼 스케일이 크잖아요. 기획사 자체 기획력도 향상됐고, 이제 노하우도 많이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 대형 기획사에서 아이돌을 양성하는데 있어서 체계적이고, 전문화되다 보니까 작곡이든, 가창력이든, 안무든, 장비든 음악적인 모든 면에서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에 비해 공연 문화에 있어서 공연장이 조금 침체되어있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K-POP은 관객들 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받고, 지원받을 수 있는데 비해, 공연장은 1년 예산안을 가지고 운영해야 하니까 한계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얼마전에 현대차 정몽구 재단에서 후원 하는 평창 계촌 클래식 축제를 다녀왔는데, 관객이 만 명 이상 왔더라고요. 클래식 축제인데 관객 만 명 이상이 왔다는 것은 홍보라든지 여러모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각 지역민에게 문화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공연장에서도 더 많은 기업의 지원과 예산 지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대예술전문인 자격증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국립극장으로 위임된 시점과 배경 그리고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는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호암아트홀에 있을 당시 무대예술전문인 자격인증 제도가 도입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무대예술전문인의 기술력 향상을 목적으로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문제점이 대두 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처음 운영하게 됩니다. 그러다 문화체육관광부 전통예술과에서 국립 극장이 운영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국립 극장 무대예술부로 이관하게 돼요. 

그때부터 현재까지 국립극장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확장 개편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충분한 예산이 지원된다면 이미 자격증을 가지고 계신 감독님들에 대한 보수 교육 이나, 자격증 시험을 상반기, 하반기 나누어서 1년에 두 번 진행하여 시험의 질을 높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러면 무대예술전문인 자격증이 대한민국 공연 예술계에 얼마만큼 기여했느냐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986년 제가 처음 공연장에 입문할 때에는 공연장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곳이 서울예전 연극과 밖에 없었고, 공연장 스태프를 양성하는 곳이 많지 않았어요. 무대예술전문인 자격증이 만들어지면서 공연 관련 학과들이 생기고, 학교에서 배운 후배들이 점점 기초가 탄탄해지고, 공연장 스태프로 자리매김하면서 기술적인 면에서도 많이 발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즘 무대음향 3급 지원자들이 매우 많아지면서 시험 수준이 높아졌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구나.”라고 느낍니다. 

(사)무대음향협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사)무대음향협회는 전국적인 조직이잖아요. 조직력 또한 탄탄해서 협회 구성원이라는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라는 점이 있다면, 선, 후배 간 친목 도모할 기회와 기술적인 교류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국립극장의 지방 투어 공연을 다니면서 지방 공연장 감독님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서울지역과 다른 지역 간 기술교류가 더 많아지면 협회 회원들에게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부장님의 지난 36년간 음향 여정을 듣다 보니, 정말 바쁘게 지내셨는데, 연애와 결혼, 그리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은 어떠셨나요?

제가 처음 음향감독으로 입사했을 때가 1986년, 나이가 26살이었어요. 그때 당시 공연장이 안정기에 접어 들지 않아서 연애 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지냈죠. 주로 직장 동료들과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직장 동료와 친해지게 되었고, 사내 연애를 하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왔고…. 사실, 저는 야근이 많다 보니까 육아는 거의 신경쓰지 못해서 어떻게 아이들이 커 가는지 모른 채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아요. 아내가 같은 분야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보니까 공연 일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이해를 많이 해 주고, 내조를 해주었죠, 많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올해 12월 정년을 앞두고 계시는데, 기분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올해 12월 31일이면 36년동안 함께한 공연장 생활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사실 그날이 두려워져요. 2001년 호암아트홀에서 마지막 공연할 때도 조금 짠했는데, 국립극장을 마지막으로 공연장을 떠나야 한다는 게….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열심히 살았구나, 그리고 잘 살았구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선배님의 가르침이 있었고, 후배들과 동료들의 도움이 많이 컸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멋지게 떠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부장님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어디서든 항상 최선을 다하여 다른 일할 곳,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틀림없이 가려고 할 겁니다. 무대음향협회 후배들에게도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저도 후배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자 더 노력하려고 합니다. 

좌측부터 김호성 무대예술부장, 지영 음향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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