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아트센터는 나의 전성기와 마무리 무대

성남아트센터는 나의 전성기와
마무리 무대

김 상 균 성남아트센터 무대운영부장

1989년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음향감독을 시작으로 성남아트센터 개관 멤버, 그리고 현재 무대운영부장까지. 어느덧 정년을 눈 앞에 두고 지난 30여년 간 공연 현장에서 무대음향협회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성남아트센터 김상균 무대운영부장님을 만나 그 동안의 못다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취재 | 성재훈, 윤보라, 김성일
자료정리 | 윤보라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 현재 성남아트센터에서 무대운영부장으로 있는 김상균입니다. 음향 일을 한 지 30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음향감독으로서 1989년 한국문화재단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처음 시작하여, 2004년 12월까지 있었고, 2005년 성남아트센터 개관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남아트센터 김상균 감독

처음에 어떻게 음향을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저는 원래 전기과를 나와서 전기 관련 일을 하고 있었어요. 건물 지을 때 전기 공사를 했었는데, 지금 말하면 약전 그러니까 소화전과 스피커 관련 일을 담당했어요. 그건 사실 완전히 PA죠. 그러다 우연히 지인이 “한국문화재단 리틀엔젤스 무대, 조명, 음향 세 파트에서 공고가 났는데 지원해봐라.”라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아무래도 일하면서 봤던 앰프와 스피커가 있으니까 음향 파트에 지원해서 시작하게 되었죠. 그때가 아마 1989년 9월일 겁니다.

리틀엔젤스 예술단이 음향 관련 처음 면접이었을 텐데 기억에 남으시나요?

⇨ 글쎄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면접관이었던 대표님 연세가 한 50살 정도였을 거에요. 지금은 제가 거의 5, 60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그때 당시에는 약간 더 위축되고 긴장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 집은 어디인지, 부모님은 계신지 물어보셨죠. 그 시절에는 인성을 볼 때 주위 환경을 많이 봤었잖아요. 그리고나서 이 일을 왜 하려고 하는지, 만약에 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셔서 제가 스피커 관련 일을 했었고, 소리를 듣고 확인하면서 “이 일이 나에게 맞다.”라고 생각해서 “음향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었죠.

당시에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은 어떤 공연장이었나요?

⇨ 리틀엔젤스 예술단 전용 공연장으로써 주로 리틀엔젤스 예술단이 공연하고, 선화예술고등학교 학생들 그리고 여타 다른 공연장과 마찬가지로 대관팀도 공연을 했어요. 그 당시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이 동양 최대의 공연장이라는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건축 인테리어도 화려해서 CF도 찍고, 음향, 조명, 무대기계 인프라 퀄리티도 높아서 조금 놀랐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공연장에는 없는, 분수 댄스 모터라고 무대 안에 분수가 탑재되어 있는 건데 상당히 이국적인 분위기가 나는 공연장이었어요.

리틀엔젤스라면 대한민국 최초의 발레단인 유니버설 발레단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이 공연하는 것을 알고 입사하신 건지, 그때 상황이 궁금합니다.

⇨ 사실 리틀엔젤스 예술단을 잘 몰랐어요. 처음에 입사해서 인사하러 갔는데, 무대에서 유니버설 발레단 공연 중에 ‘심청’이라는 공연 일본 투어를 위해 세트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확실히 기억이 나는 게 그때 당시 세트를 매달아서 전부 다 확인하고, 보수한 뒤 다시 박스에 담는 과정이었거든요. 그때부터 어떻게 보면 고생이 시작된 거죠.

음향감독 3명이 리틀엔젤스 예술단 그리고 유니버설 발레단 국내 공연과 해외공연 그리고 대관까지 담당했어요. 제가 지금까지 여행으로 해외를 나간 적은 한 번밖에 없고, 공연 때문에 해외에 많이 다녔어요. 북한을 포함해서 아프리카를 제외한 모든 나라를 다 가본 것 같아요. 162개국을 속속들이 다 간 건 아니지만, 대륙별로는 다 가본 것 같아요.

리틀엔젤스 시절 김상균 감독
리틀엔젤스 시절 김상균 감독

해외공연을 다니면서 우리나라와 다른 점 또는 감명받았던 점이 있었나요?

⇨ 세 가지 정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하나는 이국적인 부분, 그리고 음향장비, 마지막으로 그 사람들의 문화생활과 습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이국적인 부분은 평양공연에 갔을 때인데요. 저희가 12일 동안 평양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음향을 담당하셨던 선생님과 공연 준비과정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누고, 시간이 지나 그분과 학생소년예술단이 방한하여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할 때 제가 도움을 드린 경험이 있어요. 평양에서 공연할 때 요즘에 사용하지 않는 미니디스크를 사용했었는데, 선생님께 데크와 공 디스크를 드리면서 “해외공연 다닐 때 이 장비가 편하니 가지고 다니십시오.”라며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네요.

두 번째, 음향장비 부분은 제가 일본 공연을 일 년에 두, 세 번씩 해서 20번 이상은 갔는데, 93년~94년도쯤 도쿄를 갔었어요. 음향장비를 리모델링 한 공연장이라고 해서 소리를 들어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이 스피커는 뭐지?” 하고 봤더니 Meyer Sound였어요. 그리고나서 일본에 또 다른 공연장을 갔는데, 비슷하게 소리가 좋은 거예요. 그래서 “이 스피커는 뭐죠?”라고 물었더니 Apogee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희 공연장도 마침 리모델링을 계획 중이어서 스피커를 교체하려고 했었거든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Meyer Sound를 찾았는데 한참 찾지 못했었어요. 그러다 교회에 Meyer Sound 스피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서 그때 수입회사를 알게 된 거죠.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맨 처음에 들었던 그 소리가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은 워낙 모든 음향장비 퀄리티가 높아졌지만, 그때 당시에는 “진짜 명기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어요.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생활문화와 습관은 헝가리를 거쳐 이탈리아에 갔을 때 대부분 야외에서 공연을 했었어요. 야외에서 공연을 감상하는 사람들, 화목하게 같이 와서 감상하는 가족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말을 타고 다녀요. “공원에서 자유롭게 말을 타고, 공연하고, 감상하는 이런 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처음 느꼈어요.

리틀엔젤스에서 15년 그리고 2005 성남아트센터 개관과 함께 시작하여 17년째 계시는, 성남아트센터에서는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 리틀엔젤스는 제 첫 직장이고, 무엇보다 2.5t 트럭에 음향장비를 실어서 제주도에서 원주까지 공연하러 다니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음향을 빨리 배웠던 것 같아요.

성남문화재단 개관 멤버로 오면서 어떻게 음향장비를 구성하는지 이목이 쏠렸었거든요. 수준 높은 팀원들과 일 년 정도 같이 고민하고 공연장을 만들어 가면서 자긍심이 있었죠.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3대 공연장 안에 들자”라는 목표가 있었어요. 공연장 퀄리티뿐만 아니라 인적이든, 기술적이든 최고가 되자는 취지로 모든 사람이 정말 많이 노력했어요.

그래서 리틀엔젤스는 나의 초, 유년기 무대였다고 한다면 성남아트센터는 나의 전성기와 마무리 무대이기 때문에 더 애틋하죠.

현재 성남아트센터 인력구성은 어떻게 되어있죠?

⇨ 성남아트센터는 오페라하우스, 콘서트홀, 앙상블시어터 3개의 공연장이 있는데요. 현재, 무대운영부에 22명이 근무를 하고 있어요. 무대감독 6명, 조명감독 5명, 음향감독 5명, 기계감독 4명 이렇게 운영하고 있거든요. 오페라하우스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거의 100% 가동되고, 2월부터 계속 공연이 있다 보니 주 52시간제 실행에 어려움도 있고, 그래서 인원 보충을 요구하고 있어요.

성남아트센터가 알려지기까지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나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 사실 처음 내걸었던 슬로건이 ‘전 세계에 있는 다양한 공연을 한국에서 제일 먼저 만나볼 수 있는 곳, 성남아트센터’인데 큰 공연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일단 성남아트센터를 거쳐서 나가는 일을 진행했어요. 그래서 그 일환으로 뮤지컬 미스사이공도 처음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하고, 서울에서 공연을 했죠. 저희 공연장을 조금 더 빨리 알리기 위해 이런 노력을 했고, 그리고 투자와 예산확보, 인력구성 또한 신경 썼어요. 그리고 성남아트센터 자체 뮤지컬, 오페라 공연 제작을 계속해왔어요. 사실 직접 공연 제작을 할 수 있는 재단이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라트라비아타, 카르멘, 탄호이저 등 대형 오페라를 제작하여 공연했고, 금강이나 남한산성 같은 뮤지컬도 제작하면서 성남아트센터가 제작하는 공연장으로 거듭나면서 더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남아트센터 무대운영 부장으로서 자긍심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가요?

⇨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무대는 예술의전당이나 국립극장처럼 사이드 무대, 리어 회전 무대까지 전부 갖추고 있어서 어떤 장르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공연장도 그렇겠지만, 쓸 수 있는 무대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혹시라도 어떻게 될까 봐 쓸 수 있는 무대를 활용하지 않는 걸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회전 무대든, 슬라이딩 무대든 연출을 위해 필요하다면 최대한 사용할 수 있게 저희가 운영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부분 하나는 정말 자랑할 만하고, 모든 무대가 풀가동되고 있습니다.

무대운영부장으로서 그 자리에 대한 책임감 또한 막중하셨을 것 같습니다.

⇨ 사실 제가 잘했다기보다는 선배들이 끌어주고 후배들이 잘해주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 같아요. 항상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자화자찬은 아닌데, 1대 무대운영부장님부터 후배들까지 저를 믿어주고, 추천해줘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부장을 맡은 지 7~8년 되어가거든요. 우리 직원들한테 가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는데, 한 부서를 10년간 이끌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한테 불행하고, 팀원들에게도 불행인 것 같다고 해요. 순환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이제 3년이 남았는데, 부장직을 내려놓고, 2년 정도 처음 시작했던 무대에서 음향 일을 하다가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 우리나라 음향업계 분위기와 스태프 지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 음향 선배로서 지금 가장 안타까운 점이 물론 코로나 19 영향도 있겠지만, 2~30대 젊은 후배들이 많이 없어졌어요. 많은 후배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같이 일하려고 찾아도 없더라고요. 선진국은 유니언이라는 단체가 있잖아요. 그래서 각 파트 별로 일의 분업화가 잘 되어있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 특히, 음향 파트는 분업화가 잘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젊은 후배들은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사실 선배들이 필터를 끼고 후배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보다 어떻게 보면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더 강해졌다고 볼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는 음향 파트도 음향 장비 셋업 및 철수, 케이블링, 기술지원, 음향디자인 등 분업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미안한 부분이 있는데,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보면 페이는 나에 대한 존중이라고 보는데, 사실 열악해요. 물가 정보 표지에 나와 있는 대로 적용한다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현실적으로 그게 잘 되고 있지 않잖아요. 음향장비 퀄리티는 이미 다 올라갔으니까 인적, 기술적 자원을 아끼지 않고, 대우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 선배로서 역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 음향 관련 일을 할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

⇨ 음향, 조명, 무대, 기계까지 공연 관련 일을 하는 우리는 관객들이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보여주고, 들려줘야 하는 직업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때 우리는 일을 하는 거죠. 결국, 큰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남다른 사명감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무엇보다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없으면 이 일을 하기 힘들다는 거죠. 오래 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일에 대한 자기만족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자신만의 중심을 잡고, 내가 최고라는 정신으로 이 분야에 접근하는 친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공연장에서 채용할 때 자격증이 필수잖아요. 이 필수 조건을 내거는 이유는 기술적인 부분도 있지만,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 이 일을 하고 싶어서 준비한 사람이니까,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부장님의 지난 30년간 음향 여정을 듣다 보니, 정말 바쁘게 지내셨는데, 연애와 결혼, 그리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은 어떠셨나요?

⇨ 제가 89년 3월에 결혼하고, 9월에 리틀엔젤스에 입사했는데요. 그때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1년에 3분의 2는 지방에서 공연하고, 해외에서 공연하다 보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이 없었거든요. 지금도 감정적으로 흔들렸던 때가 있었는데, 첫째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45일인가 60일 일본 공연을 하러 갔어요. 오랜만에 첫째 아이를 만났는데, 제 얼굴을 보고 도망가는 거예요. 눈치를 보다 나중에는 와서 안겼는데, 그때 참 마음이 쓰였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아내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하죠.

곧 정년을 앞두고 계시는, 가족들과 같이하고 싶은 일이나 부장님의 또 다른 꿈이 궁금합니다.

⇨ 일단, 아이들이 속 썩이지 않고 30대가 되어줬다는 점이 고맙고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 가족들은 여태까지 한 번도 떨어져서 지낸 적이 없거든요. 다 같이 한집에서 지내왔는데, 아이들은 이제 다 컸으니까 앞으로 아내와 일 년이라도 캠핑카 하나 가지고 같이 손 붙잡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행하고 싶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일 년이나 이 년 정도 자연에 들어가서 한 번쯤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제 협회 이야기로 넘어가서 언제 협회 가입을 했고, 그때 당시 분위기는 어땠는지 말씀해주세요.

⇨ 89년도인가 90년도에 가입했을 당시에는 소리회였어요. 그때 협회 회장님이셨던 한철 고문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나는데, 양평인가 양주인가 방갈로 같은 곳에서 항상 모임을 했어요. 그날도 아마 방갈로였고, 비가 왔을 거예요. 제 사수 전계식 대표님과 같이 가서 인사를 드릴 때 “누구야? 그게 너냐? 이게 너야? 잘 왔다. 앞으로 진짜 우리 잘해보자.” 말씀하시면서 큰 형님같이 맞이해 주셨거든요.

다 아시겠지만, 처음에는 협회가 서울에 있는 큰 공연장 위주로 모였다고 그래요. 그러면서 이제 전국적으로 커져서 지금의 협회가 되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진짜 하나같이 친가족 같고, 모든 사람이 서로 인간적으로 잘 지냈던 것 같아요. 회원 수도 얼마 안 됐었고, 그래서 단합이 잘 되고 선, 후배 관계가 유기적으로 잘 흘러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소리회 멤버가 어느 정도 되었나요?

⇨ 멤버가 12명에서 15명 정도 있었어요. 지방에는 없고, 서울에서도 1천석 이상 객석을 가진, 공연장에 있는 음향인들이 모였던 것 같아요.

주로 모임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 모이면 잡다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공연 진행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나 “이런 부분이 힘들었는데 내가 이렇게 해보니까 좋더라.”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술 정보를 교류하고 각자 공연하면서 겪었던 경험담들을 나눴어요. 더 나아가 사적인 이야기도 하면서 말 그대로 우애를 다졌던 것 같아요.

그때 가장 기억에 대화 내용이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 한번은 여름에 모임을 했는데, 그때 태풍이 엄청나게 크게 왔어요. 운전하기 힘들 정도여서 많은 분이 못 올 그런 상황이었는데 한 분, 두 분 오시더니 어느 순간 전부 모이는 것을 보고 “진짜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도 갔고, 나오다가 산에서 돌이 굴러 떨어져서 도로도 끊기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는데, 그런데도 이 비를 뚫고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사회에서 만났는데 진짜 형제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협회 기술세미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 제 기억으로는 하계수련회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때 선배님들이 2시간, 3시간씩 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도록 기획했던 것 같아요. 협회 초창기에는 이렇게 진행하다가 지역별로 지부가 생기고, 각 지부에서 세미나를 주최했어요. 그때 당시에 다른 지부에 비해서 경인지부가 의욕도 강했고, 단합도 잘 됐고, 후배들도 생기다 보니 서로 정보와 지식 교류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지부 세미나를 처음 개최했던 것 같아요. 직접 강사를 초빙하여 진행했고, 경인지부가 활성화되면서 각 지부에서도 세미나를 주최했던 것 같아요.

4년간 경인지부장을 맡으셨는데, 기억에 남는 행사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 눈에 띄게 했던 일은 없는 것 같고, 그때 경인지부 회원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세미나도 열의를 갖고 진행했고, 모임도 어느 한 곳에서만 모이기보다는 경기 남부, 중부, 북부, 인천 각각 소그룹별로 자주 모일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무대음향협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 (사)무대음향협회가 정식적으로 법인으로 출발도 했고, 무대예술전문인 다른 협회보다는 노하우도 많고, 활성화되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선두주자죠.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와해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심지 그러니까 기둥이 흔들리지 않고, 조금 흔들리더라도 그 뿌리가 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협회 고문님들부터 선배, 후배들까지 같이 대화하기가 어렵다는 건 아는데, 하나의 목적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하는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렇게 하려면 선배들이 잘 해줘야 되겠죠. 후배들이 다가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고, 선배들이 후배들을 다독여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자주 마련되면 좋겠어요. 그래야 조금 더 뿌리가 깊게 내려서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괜찮은, 계속 꾸준하게 발전하는 협회가 되리라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음향업계가 어떻게 발전했으면 좋겠는지 한 말씀 해 주세요.

⇨ 음향시스템 발전은 이미 많이 했잖아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일단 저 자신을 돌이켜보면 “아, 조금 더 발 벗고 나서서 내가 더 했으면 어땠을까? 협회 일도 그렇고 경인지부 일도 그렇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할걸.”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후배와의 관계에서 보면 제가 선배라고 먼저 와서 인사하고, 같이 해 주려고 하고, 챙겨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상당히 고맙거든요. 이게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음향인들이 전국 각지에 많이 있는데, 제가 항상 교육하러 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공연장에서 검정 옷을 입고 있는 스태프들에게 잘 대해 주세요. 그분들이 무대에서 진짜로 고생 많이 하고 높은 퀄리티의 공연을 할 수 있는 분들이니까. 배우들도 좋지만, 스태프들에게 따뜻하게 말 한마디 해 주세요.” 그리고 “공연장 주위에 검정 옷 입은 사람들은 다 우리 스태프들이니까 격려도 많이 해 주세요.”라고요.

사실 음향이 옛날에는 소리만 크고, 잘 들리면 최고였지만, 요즘에는 음질을 따지는 시대가 되었고, 이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세대들이기 때문에 일반 시스템으로는 충족하기 힘들잖아요. 관객의 만족을 위해서 지금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하기때문에 참 힘들 거에요. 특히, 요즘에는 민원도 구체적으로 많이 들어오는데, 음향은 누군가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하려고 해도 못 하는 일이니까 “음향전문인으로서 내가 하는 이 일은 최고의 내 직업이다.” 그리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것을 만든다.”라고 생각하면서 후배들은 꾸준히 더 노력해 주고, 선배들은 후배들이 쉽게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본인이 먼저 경험한 노하우를 전수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얼마 안 남았지만 앞으로 은퇴하더라도 지켜보면서 선배로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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