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아리랑센터 김동철무대음향감독

Prologue
지난 7월, 여름의 짙은 초록이 산자락을 감싸고 있던 정선으로 향했다.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에 위치한 정선아리랑센터는 이름 그대로 지역의 소리 ‘정선아리랑’을 중심에 두고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공연을 펼치는 전통 브랜드 공연장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의 무대 뒤에는 묵묵히 공간을 지키며 안정적인 기술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김동철 감독이 있다. 대구·경북지부에서 음향 렌탈, 공연장 음향감독을 시작으로 오랜 경험을 쌓아온 그는, 몇 해 전 고향과 가까운 정선으로 돌아와 정선아리랑센터의 개관 멤버로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그는 직접 장비를 손보고, 오래된 공간을 조금씩 바꾸며, 회관 안팎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음향감독이자 공간 운영자로서, 동시에 지역 공연 생태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닌 사람.
김동철 감독은 지금 이곳에서 공연장이 품을 수 있는 진정한 ‘공공성’에 대해 묵직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정선에서의 삶, 공연장 이야기, 그리고 여전히 공연장을 사랑하며 이제는 어느새 완숙한 중년이 되어버린 김동철 감독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 정선아리랑센터 앞으로 펼쳐진 조양강의 탁 트인 전경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정선아리랑센터의 음향감독 김동철입니다.

처음에는 대구에서 음향을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대구에서 음향 일을 하게 되었나요?

제가 원래는 동해에서 해군 부사관으로 근무를 했었어요. 그때 군대 동기 중에 이춘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같은 배에서 근무를 하다가 그 친구가 먼저 나한테 말을 걸었어요. 동기라면서 반갑다고. 당시 제가 기타 치고 음악을 하고 있었는데 본인도 그런 쪽에 관심이 있다며 먼저 다가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친하게 지내게 됐죠. 그러다 98년도쯤 제대하고 저는 2년 동안 거기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자기가 음향을 한대요. 자기가 음향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대구로 간다는 거예요. 그때 저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음향이 뭔데?’ 하는 거에 ‘이런 일이야’ 하면서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당시 퇴직금 받았던 걸로 수입 없이 홀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음악을 많이 접할 수가 있고 이런이런 것들을 할 수가 있다’ 하는 말에 같이 대구로 내려갔어요.

그때가 1999-2000년도쯤이었는데, 대구의 백두음향이라는 렌탈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그렇게 음향을 시작했어요. 당시 다들 음악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우리들만의 스타일이 확실했어서 같이 일하는 형들과 손발이 잘 맞아 많이 배우고 재밌게 일했었습니다. 그때 백두에서 일을 했던 게 큰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음향이라는 일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된 것도 그렇고, 인맥을 쌓게 된 것도 그렇고. 그렇게 백두에서 딱 4년 일을 하고, 대구 대백 프라자의 프라임홀을 리모델링 하면서 대백 프라임홀에 들어갔어요.

대백 프라임홀에서는 얼마나 일하셨나요? 그때 일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대백 프라임홀에서 꽤 오래 있었어요. 7-8년 정도. 리모델링 후 재개관 공연으로 가수 해바라기가 첫 공연을 했는데, 사실 그때는 저도 음향에 대해서 제대로 정립이 안 된 상태였어요. 이전까지는 무대에서 크루의 위치로만 일하다가 온 건데 장비는 이미 확정이 돼 있을 거 아니예요. 스펙 같을 걸 가지고 업자들이 얘기를 하는데 내 머리에서는 정리가 안됐죠. 이전에 써본 적 없는 처음 보는 장비들이고. EAW KF750이 있고 앰프가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칭이 안 되는데 내가 업체랑 얘기를 하려면 그걸 알아야 되잖아요. 나름 혼자 생각을 해서 매칭을 해보고 백두에 있는 형한테 전화를 해봤어요. ‘형, 상황이 이런데, 이렇게 이렇게 하면 안 돼요?’ 하니 ‘그렇게 하면 돼. 그게 맞아. 앰프가 그렇게 와서 이렇게 하면 돼.’ 하고 답변을 듣는데, 내 스스로 크게 놀랐어요. 사실 백두 다니면서 일을 그냥 대충 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나름 잘 배워왔던 거죠. 어떻게 연결을 해서 어떻게 임피던스 매칭을 하고, 이걸 내가 혼자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진 거예요. 그간 공부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일하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익혀졌다는 거에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는 ‘내가 이제 공부를 좀 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또 그때 당시 대경 지부의 회원들이 공부를 진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조금 했어요. 진짜 조금. 많이 하지는 않았고 진짜 조금만(웃음).

무대에서 바라본 객석 전경

대백 프라임홀에서 약 7~8년 근무하시고 다음으로는 대구 봉산문화회관으로 가시는데요. 봉산으로는 어떻게 이직하시게 된 겁니까? 

모 무대감독이 우리 협회 모임에 다른 음향감독 따라 온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그날 협회에서 회원들한테 증정품으로 라이트를 하나씩 나눠줬는데 그 분은 협회 회원이 아니니까 못 받잖아요. 그게 나한테는 크게 필요한 게 아니었어서 그걸 그 감독님한테 이거 챙기시라면서 줬었어요. 근데 그걸 고맙게 생각했던 거예요. 나를 얼마나 좋게 봤던지 나중에 2009년에 음향감독 자리가 비었다고 한번 지원해 보라며 전화를 준 게 봉산문화회관이었어요. 그렇게 지원해서 면접 보고 합격해 들어가게 됐는데,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해요.

FOH에서 바라본 무대 전경

그 다음으로는 대구에서 정선으로 이직을 하게 됩니다. 근무 환경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대구에서는 어쨌든 임기제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래도 재계약이라든가 이런 게 좀 원활하지가 않았어요. 봉산에서 5년 근무를 마치고 몇 개월 쉬다가 여기 정선 공고 보고 지원하게 됐습니다. 고향이 강원도 태백이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정선을 선택하게 됐죠. 생각보다 여기에 와서 더 좋았던 게, 호봉 적용이 다 되니까 임금을 높게 시작할 수 있어 좋았어요. 그리고 일단 여기 개관 멤버라는 게 좀 남달랐죠. 정선아리랑센터가 2016년 5월 19일 오픈을 했는데, 4월달에 제가 왔거든요. 처음에는 시설이라든지 미흡한 게 조금 많이 있었어요. 그런 걸 보완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내 경력이 많이 도움이 됐던 것 같고, 또 정선군에서도 시스템화하는 데에 지원을 많이 해주기도 했고. 솔직히 이 정도로 시스템이 많이 갖춰져 있는 곳이 이런 시골 공연장 중에는 별로 없을 거예요 아마.

옆무대에 정리되어 있는 상설 공연의 소품들

정선아리랑센터는 조직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나요?

저희 극장은 정선아리랑문화재단 소속으로, 경영기획팀, 문화사업팀, 공연예술팀, 시설관리팀, 문화마케팅팀, 그리고 박물관팀으로 6개의 팀이 있어요. 그 중 공연예술팀은 팀장인 제가 있고, 무대조명 하나, 무대기계 하나, 예술단 단무장, 그리고 9급 서무 한 명 이렇게 있습니다.

 정선아리랑센터 김동철 감독

재단 소속의 극장이었군요.

맞습니다. 정선아리랑문화재단 소속이예요.

문화재단은 2008년 설립이었어요. 그때는 군청 사무실의 작은 한 공간을 받아서 운영을 했었는데 2016년에 정선아리랑센터를 개관하면서 그걸 기점으로 재단이 커졌죠. 사실 우리 상설 공연만 해도 배우들만 20명이 넘는데 그걸 커버할 수 있을 만큼 무선 마이크가 40채널 있고, 인이어도 8채널이 있어요. 이 장비들을 도입할 때 군에서도 크게 무리 없이 지원을 해줄 만큼 예산 사용이 비교적 수월합니다. 그리고 현재 이사장님은 워낙 관심이나 열정도 많으셔서 센터에 대한 지원도 아낌없이 배려해 주시는 편입니다. 덕분에 많은 발전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서라운드 스피커. JBL 8320 사용 중이며, 공연의 효과음 담당으로 활발히 활용 중이다.
무선 마이크 리시버와 파워 앰프.
무선 마이크는 SHURE ULXD4Q로, 40채널 보유 중이다.
파워 앰프는 Crown I-TECH 12000HD와 5000HD.

무대 기술 인력은 파트당 한 분씩만 계시는 건가요?

네, 파트당 하나씩 해서 3명만 있고 보조 인력은 없어요. 대신 공연 때마다 크루를 고용해서 공연 운영을 하죠. 가장 아쉬운 게 그거예요. 토요 상설 공연 같은 경우는 제가 직접 오퍼를 해서 크루가 필요한데요. 최대한 정선의 젊은 친구들 위주로 크루를 꾸려서 키우고 싶은데 그게 어렵더라고요. 크루들만 약 10명이 넘는데 다 서울에서 와요. 그리고 정년이 62세인데 제가 이제 아마 10년 하고 조금 더 남았을 거예요. 젊은 친구들이 이쪽에 관심을 갖고 잘 배워서 잘 크면 향후에도 극장이 계속 잘 돌아갈 수가 있잖아요. 외지에서 계속 사람을 뽑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크루의 정선 친구들 중에서는 영상 오퍼라든가 RF라든가 정도의 역할밖에 안 돼서, 더 관심을 갖고 이끌어나갈 친구들이 아직은 없다는 게 좀 아쉬워요. 능력을 잘 키우고 발전시키려고 같이 노력 중에 있어요.

운영 인력에 관해서 여러모로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렇죠. 또 하나 아쉬운 건, 영상 감독 자리의 부재예요. 상설 공연이 연출 상 영상 비중이 좀 크거든요. 그런데 그걸 계속 외주 업체에다 운영을 맡기다 보니까 그게 너무 아쉬운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영상 감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갖고 있습니다.

극장에는 어떤 공연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또 공연이 또 많아요. 상설 공연이 계속 돌아가고 있는데, 장날 공연하고 토요일 공연 해서 두 개의 상설 공연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상설만으로도 한 달에 한 9-10번은 공연을 해요. 그렇게 거의 상설 공연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중간중간 기획 공연, 대관 공연도 있죠.


  장날 상설 공연 <아리아라리>의 포스터
토요 상설 공연 <뗏꾼>의 포스터

두 상설 공연에 대해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아리아라리>는 예전에 경복궁 중수할 때에 정선에서 엮은 소나무를 뗏목 타고서 서울에다 운반해주는 일을 하던 신기목이라는 뗏꾼이 돈을 벌기 위해 한양으로 떠났다가 노름으로 번 돈 잃고 기억 잃은 채로 살다가 다시 가족을 만나는 이야기예요. 해학도 있고 재밌어요. 여기 정선에 오일장이 2일, 7일날에 열리는데, 바로 이 장날에 하는 공연이예요. 2018년도에 만들고 시작해 지금까지 하면서 홍보가 잘 돼서 이제 좀 많이 알려졌죠. 풍물과 함께 내용 자체가 좀 빠르게 진행돼서 재밌고, 또 장날에 하다 보니까 관광객들이 좀 많이 오는 편이예요. 원래 이 공연 초연 때부터 오퍼를 제가 봤었는데, 22년도에 팀장직을 맡으면서 팀 업무가 많아지다 보니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정선군문화예술회관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있는 문원기 감독한테 부탁해 지금까지 문 감독이 이 공연 오퍼를 맡아서 해주고 있습니다.

상설 공연의 영상 바닥 매핑을 위해 배튼에 행잉한 프로젝터. EPSON EB-PU2220B.

<뗏꾼>은 우리 정선군립아리랑예술단이라는 군립 소속의 국악 예술단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정선아리랑을 가지고 만든 공연이예요. 뗏목을 몰면서 나무 등 여러 짐을 운반해주는 일을 하는 뗏꾼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순수 정선아리랑 가사로만 만들었어요. 정선 이 지역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소리 공연이라 정선아리랑을 제대로 들어볼 수가 있고, 영상이 많이 활용되는 공연이라 사람들이 참 재미있어 해요. 앞선 공연보다는 해온 기간이 짧지만 이제 거의 자리가 잡혔고 거기서 조금씩 더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공연은 초연부터 지금까지 제가 직접 오퍼를 맡아 하고 있어요.

두 공연 모두 반응이 정말 좋아요. 처음에는 다들 ‘시골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하겠나’ 기대 않고 보다가 끝나면 다 ‘와’ 하면서 나가요.

감독님의 공연 소개에서 공연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네요.

남들이 봤을 때는 작은 동네라 별 기대를 안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상설 공연 둘 다 나름 퀄리티가 좋거든요. 보통 처음에는 쉽게 생각하고 ‘작은 동네에서 뭐 얼마나 대단한 공연을 하겠어’ 하면서 봐요. 저번 주에는 어떤 기자분이 오셔서 보시고는 진짜 감동을 하고 기사를 쓴 거예요. 그 분도 큰 기대 없이 와서 봤는데 크게 감동을 하고 간 거죠. 우연히 그 사람이 쓴 기사를 읽었는데 우리가 뿌린 보도 자료가 아닌 본인이 직접 제대로 보고 나서 쓴 감상이라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사실 저희는 티켓을 다른 예매 사이트를 통하지 않고 재단 홈페이지에서 자체적으로 판매를 하면서 티켓가를 5000원으로 하고 있어요. 게다가 티켓 수령 시 동일 금액의 지역 상품권을 드리고 있어서 사실상 무료 공연이 돼요.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기대 없이 가볍게 보러 왔다가 놀라고 감동 받고 돌아가는 공연인 것 같아요.

이곳 정선아리랑센터의 사운드 시스템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선 저희 메인 스피커는 JBL의 VT4888로 좌우 6통씩 있고, 서브로는 VT4882로 맨 위에 2통씩 있습니다. 모두 개관 당시부터 사용하던 장비들이예요. 저희 공연 자체가 우퍼를 많이 쓰는 스타일은 아니고, 대관팀들이 오면은 본인들 필요에 따라 스택으로 우퍼를 두는 경우도 있어요. 중앙 센터 스피커는 MEYER의 CQ-1을 쓰는데, 4열 정도까지는 커버가 돼요. 1년에 한 번씩은 홀 튜닝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좌우 화면 모니터는 처음엔 65인치 TV가 달려 있었는데, 2017년도쯤에 LED 전광판으로 새로 구입을 해서 지금은 약 130인치 정도 돼요. 서라운드 스피커는 JBL 8320인데 공연 때 효과음은 다 서라운드로 해서 꽤 많이 활용을 하고요. 패치는 리어 L R하고 사이드 L R 해서 두 채널로 돼있어요. 그래서 분리를 좀 하고 싶은데 계획 중에는 있어요.

  • 메인스피커 JBL VT4888과 서브 VT4882.

FOH 구성은 어떻게 돼 있습니까?

FOH 장비들도 다 처음 개관할 때 구성이 돼있던 것들이예요. 콘솔은 Soundcraft의 Vi7000이예요. 아이맥 프로 두 개로 주와 보조로 쓰면서 큐랩 사용하고, 녹화·녹음용으로도 쓰고요. Smaart도 계속 모니터링 할 수 있도록 모니터도 구비해놨고, MADIface 인터페이스는 녹음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FOH 뒷쪽 컨트롤룸에는 영상 장비들을 많이 구비해뒀어요. 영상 작업용으로 맥 스튜디오도 두고 있고, 녹화용이랑 분장실쪽 모니터링 장비들이 있죠. 프로젝터는 공연용과 일반 행사 PPT 띄우는 용으로 쓰는 게 나눠 놓았어요. 올해 바꾼 건데, 기존 램프 방식 16,000 ansi이던 걸 파나소닉의 PT-RZ31K 모델로 31,000 ansi짜리로 바꿨어요. 그리고 앱손의 3LCD 방식 20,000 ansi짜리 EB-PU2220B 프로젝터는 무대에 달아두고 상설 공연 때 바닥 매핑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무대 배튼에 달아야 하니까 다른 배튼이나 조명에 간섭이 생기지 않도록 프로젝터의 성능 이외에도 사이즈 같은 걸 신경을 많이 썼어요.

컨트롤룸의 카메라 영상 모니터링용 매트릭스와 4분할기.
영상 SDI 분배기와 자막기용 영상 분배기.

로비에도 여러가지 안내 영상 나가는 게 정말 많더라고요. 공연 배너까지도 영상으로 플레이가 되니 영상 소스나 장비들 관리까지, 영상 감독이 있으면 좋겠다 하신 게 이해가 되더군요.

맞아요. 스탠딩형 공연 안내 배너 같은 경우에는 전원만 연결돼 있고 프로그램을 통해 무선으로 영상을 보내고 있어요. 그러면 공연 시작하고 한 20~30분 있다가 안에서도 다음 공연 포스터로 화면을 바꿀 수가 있어요. 영상을 정말 다방면으로 활용하고 있어서 장비 유지 보수만 하더라도 소소하게 일이 많이 있어요.

컨트롤룸의 영상 랙 앞에서, 김동철 감독.

야외에도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 같던데요.

야외에는 아라리촌이라고, 야외 공연장으로 만든 곳이 또 있어요. 데크도 깔아놓고 울타리를 해놔서 예쁘고 민속적인 분위기가 있죠. 원래는 시설관리공단에서 운영을 하다가 이번에 우리가 맡게 됐어요. 여름에는 스피커랑 장비들 설치해서 예술단 공연을 여기서 하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가 매년 정선아리랑제라는 축제를 하는데 각 읍면별로 퍼레이드를 하거든요. 올해는 9월 말에 하고 이번에도 퍼레이드를 할 예정이예요. 여기 아라리촌 안을 돌면서 애들을 태워주기도 하고 공연도 하고, 도로에도 나가서 행진하기도 해요.

  • 공연 포스터와 정보 등을 띄울 수 있는 로비의 스탠딩형 안내 배너.

2000년대 초반 협회에서 지부가 생기기 시작한 때에 감독님은 대경지부의 초창기 멤버라고 전해지는데, 협회 가입은 몇 년도에 어떻게 하시게 된 건가요?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초기 때, 2000년도 초반쯤 될 거예요. 제 기억으로는 그때 누구 소개로 가입하고 그랬던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위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었어요. ‘내가 협회에서 뭘 해보겠다’ 이런 것도 아니었어요. 사실 그냥 ‘협회 중앙에서 각 지부를 만들려고 하는데 여러분들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면서 시작을 했는데 회원들 참여도와 단합이 가장 강력했던 게 대구 경북이었어요. 거기다가 기술력 있던 친구들도 있었고, 그걸 통해 협회 활동을 하면서 선후배간에 기술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고 받았던 좋은 영향력도 있었어요. 그래서 덩달아 재밌게 활동을 했죠.

지금은 강원·제주 감독님들 간의 교류도 이어나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원도하고 제주도하고, 따로 협회 지부가 없는 감독들이 모인 카톡방이 하나 만들어졌는데, 저도 그 안에 속해 있습니다. 저는 그게 좀 힘들었거든요. 연초가 되면 협회비를 보내야 하는데 협회비 공문을 요청 받는 사람이 종종 바뀌어서 다른 거예요. 지부가 없으니까 연초에 ‘공문 필요하신 분 연락 주세요’ 하고 미리 공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공문 하나 요청하기 위해 계속 여러 곳을 거쳐야 하는 게 매번 너무 번거롭더라고요. 각자의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우리끼리라도 뭉쳐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톡방에 저도 초대가 되었고, 지금은 그 안에서 즐겁게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인원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지부를 만들면 좋은데 사실 다들 그 일을 맡아서 하지를 않으려 하죠. 지금 강원·제주 단톡방도 운영하는 친구가 좀 힘들어 해요. 그래서 중앙에서 공식적으로 관리를 도와줬음 좋겠는데, 쉽지가 않네요. 

정선에서 근무하신지도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곳에서 일하시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저는 정이예요. 제가 여기 왔던 초반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전용우라고, 우리 정선군립아리랑예술단 단무장이 먼저 옆에 오더라고요. ‘취미가 뭐예요?’ 자기는 정선 내에서 사회인 야구를 하고 있고 내가 지금 이러이러한 걸 하고 있는데 같이 할 생각 없느냐는 얘기를 하면서 다가왔는데 나는 그게 너무 좋았어요. 제가 또 운동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얘기가 더 반가운 것도 있었죠. 그 사람이 정선 토박이다 보니까 아는 사람도 많고, 저녁이면 항상 그 사람하고 술 한 잔 하고 하다 보니까 여러 사람 만나며 다 알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람 덕분에 이 정선에서의 생활의 적응이 너무 빨랐어요. 그때 그게 참 고마웠고 지금도 여전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렇게 지역을 옮기시는 와중에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감독님의 결혼 스토리도 궁금한데요.

결혼은 봉산문화회관 가기 전 대백에 있을 때 했어요. 제가 취미로 사진 찍으러 많이 다녔거든요. 거금을 들여가지고 니콘 D300 그 비싼 걸 사서는. 그때 네이버 블로그가 활성화 돼있던 때라 내 개인 블로그에 찍은 사진들 올리면서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이제 지역에 사진 찍는 친구들을 만나고 같이 찍으러 다니면서 사진 공부를 하기도 했었죠. 필름 카메라를 쓰면서 동호회 활동도 했는데, 그때 동호회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의 친구로 와이프를 처음 만나게 됐어요. 그게 2007년도였네요. 와이프는 사진을 좋아했던 건 아니고, 사진 찍으러 갈 때 친구 따라 자주 같이 놀러 오면서 알고 지내게 됐고, 그렇게 만나다가 2009년에 이제 결혼하게 됐어요.

결혼 후에는 갑자기 지역을 옮기게 됐는데 가족분들의 서포트도 컸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인데, 우리 와이프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 같아요. 당시에 제 외벌이였는데 제 일이 이쪽으로 오는 와중에 혼자 대구에 남을 수는 없잖아요. 강원도에 이런 자리가 났는데 조건이 나쁘지가 않다고 설득을 해서 와이프와 당시 어렸던 애들이랑 다 같이 이사 오게 됐어요. 아이들한테는 여기가 고향인 셈이죠. 친구들도 다 여기 있고. 지금은 큰 애가 중3이고 작은 애가 중1인데, 특히 우리 큰 애 같은 경우엔 자기가 리더가 돼서 주도적으로 이런 저런 생활을 하는 걸 보면 너무 대견하고 고마워요.

대구에서와는 환경이 또 크게 달라졌을텐데, 이사 후의 생활에 적응하기에는 어떠셨나요?

애들이 7살 때쯤 여기 왔었는데, 처음엔 여기 정선에 소아과가 없어서 태백이나 강릉까지 가야 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그래도 살다 보면 나름 느끼는 재미가 있어요. 저 개인적으로 그 재미가, 여기는 일 끝나면 쓱 가다가도 ‘술 한 잔 해’ 하면서 같이 한 잔 마시러 가요. 왜 마시는데? 그냥! 그냥 한 잔 같이 하러 가는 거예요. 근데 또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아서 먹을 데가 없는데 어디서 먹나 하고 우려했었는데, 편의점들이 이렇게 활성화된 줄 몰랐어요(웃음). CU 앞에 앉아서 한 잔 더 마시고 그랬죠. 그걸 보면서 여유가 있고 좋다고 느꼈어요. 동네 사람들끼리 같이 즐길 수가 있는 여유.

감독님의 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이곳이 2016년도에 개관을 해 내년이면 10주년이 되어서 시스템 리모델링에 대한 계획을 조금씩 구상하고 있어요. 전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콘솔 같은 부분 부분을 구상하는 중인데 코바 같은 곳들에 참석해 이것저것 보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쪽에도 계속 얘기를 하고 있는데, 조감독이라든가 영상감독 같은 인원을 충원해서 운영하는 데 있어 조금 더 전문화를 시키고 싶어요. 아무래도 저는 영상을 운영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전문 인력을 배치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SSM의 애독자이십니다. 마지막으로 SSM 구독자분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협회 다른 감독님들에게 안부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를 아시는 분이야 해봤자 뭐 대구권밖에 더 있겠습니까?(웃음) 대구권은 간간히 통화는 하는데, 감독님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고 하며 살았는데,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제 소식을 좀 알리게 됐네요.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pilogue
그때는 어느날 갑자기 모든 걸 뒤로하고
홀연히 떠난 것처럼 느껴졌던 감독이었는데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오히려 제 몸에 맞춘 옷을 이제서야 제대로 입은 사람처럼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평안해 보였다.
그는 떠난 것이 아니라, 다른 풍경 속에서 계속
자신만의 무대를 꾸준히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활동하는 영역이 바뀌었지만,
공간을 읽고 사람을 엮는 그의 일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김동철 감독은 오늘도 정선이라는 무대 위에서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세상 모든 풍파에 아랑곳없이
유유자적 흐르는 조양강의 물결처럼
그곳에는 언제나 늘 '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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